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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hgdty.tistory.com pdhgdty [대여] 지명이 품은 한국사 2 2 정조의 슬픔이 남은 곳 - 작품에 남겨긴 정조의 마음 * 정조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 * 화산의 또 다른 이름 꽃뫼 수원시 팔달산 - 이고가 정착한 무한히 아름다운...우물이 있는 마을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 - 세종의 아들 평원 대군과 양손자 제안 대군이 묻혔던 마을 성남시 중원구 모란 마을 - 대규모 마을 개발과... [대여] 지명이 품은 한국사 2 2024.02.02 블로그 검색 더보기 www.48lrc.com 포도남 잘못된 도망자, 조선 16대왕 인조'이종'이야기 (feat. 인조반정, 병자호란, 이괄의 난) 이종, 능양군 (1623~1649) 사실 인조의 어린 시절은 사료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능양군으로 봉해진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죠.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능양군은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였습니다. 항상 왕권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은 자신과 같은 후궁소생의 자녀들의 늘 견제하곤 했습니다. 특히 정원군의 아들인 능창군(능양군의 동생)은 군왕의 기질이 다분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총명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할 만큼 다재다능한 인재였습니다. 어느 날 정원군의 가족이 있는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말을... 인조반정 (1623) 당시 광해군에게 대적했던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서인세력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중립외교를 비판하였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서인세력은 대의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력으로 임진왜란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명군이 도와주었기에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력이었습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다스리는 명군이 참전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죠. https://www.48lrc.com/entry/manlyeogjes-story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명나 인조 (1623~1649) 영화 남한산성 '인조' 인조는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던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명과 친하고 금나라를 배척)의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도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는 반면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은 명나라를 압박하며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는 중이었죠. 안타깝게도 인조와 서인세력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명나라와의 사대만을 주장합니다. 이괄의 난 (1624) 드라마 화정 '이괄' 인조는 집권초기에 큰 반란이 일어나는데, 앞에서 언급하였던 이괄이라는 자는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반정군을 진두지휘하며 큰 공을 쌓았죠. 하지만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중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봉이 되고, 외지인 평안도 북방지역으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인조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집권세력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괄을 견제하던 서인이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라며 인조를 몰아세우게 되죠. 이에 이괄의 아들을 직접 체포하기... 정묘호란 (1627) 이에 후금은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3만의 기병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인조는 그들이 기동력을 앞세워 쳐들어온 것을 알아채고는 소현세자에게 분조를 맡기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게 되죠. 조선군은 후금군에 맞서 싸우고 퇴각하고를 반복했습니다. 사실 청은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내려온 것은 아니었죠. 위협만 주기 위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군의 저항에 시일이 길어지며 교섭을 하게 되죠. 인조는 강화도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후금은 몽골군이기에 바다에서... 병자호란 (1632) 정묘호란 후 5년이 지나고, 명의 세력은 점점 더 약해졌으며, 후금의 황제인 '홍타이지'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의 국가로 칭하며 조선에게 형제국가가 아닌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압박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신하의 나라가 되라는 것이죠. 게다가, 홍타이지의 청나라 황제 즉위식에 각국의 사신들이 와서 머리를 숙여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으나, 조선에서 사신으로 간 나덕헌과 이확은 두 황제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이 두 사신은 엄청난 구타를 당한 뒤 조선임금의 세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청황제... 병자호란 후 인조는 선조와 같이 전쟁 후 자신의 무능을 질투로 표출하는데, 그 질투의 화살은 바로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향하게 됩니다. 8년간 청나라에 볼모생활을 한 소현세자는 혹독한 청나라의 대우에도 꿋꿋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행하게 되죠. 이러한 소현세자가 맘에 들었는지 청에서는 소현세자의 능력과 인품을 좋게 보았고, 황실행사에도 초대하는 등 훌륭한 외교관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이를 팔아 이문을 남기고 남긴 이문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간 조선인들 사서 조선... 7 사실 인조의 어린 시절은 사료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능양군으로 봉해진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죠.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능양군은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였습니다. 항상 왕권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은 자신과 같은 후궁소생의 자녀들의 늘 견제하곤 했습니다. 특히 정원군의 아들인 능창군(능양군의 동생)은 군왕의 기질이 다분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총명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할 만큼 다재다능한 인재였습니다. 어느 날 정원군의 가족이 있는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말을... 남한산성 호란 인조반정 소현세자 인조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괄의 난 조선 인조 조선 16대왕 2023.08.30 blog.naver.com 산나드리 21.12.5 성남 낙생대공원-"판교 통일시라-고려고분군"-덕수이씨의정공파(이통) 170 묘역 : 성남시 향토문화재 제10호 이경안(1572~1614) :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우(汝愚), 호는 송석(松石)이다. 아버지는 순천군수를 지낸 이통(李通)이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160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학정(學正)으로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2023.01.02 blog.naver.com 오포베르빌부동산(풍수지리) 남경문 묘 풍수, 의령 남씨. 성남지역 13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산3~8번지 <남경문 묘 전경> 1. 인물<1370년(공민왕19)~1403년(태종3)> 고려 말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 조선개국공신...조부 남을번 묘역을 조성한 후 후손들의 길흉 분석(남경문 기준) <가계도 요약> 조부 남을번은 1395년 사망하였는데 손자 남경문은 장 후 1403년에 요절... 2022.06.13 blog.naver.com 책먹는 고양이 호두 비와 비-격정의 시대 속 나는 내 진짜 이름을 찾고 싶었다. 6 봐서 제가 직접 만들어봤어요 ㅎㅎㅎ [비와 비]출간 기념 북토크, 비전성남 겉표지에도 주석을 프린트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석 꼭 보는걸로!! 🔶이런...역사로맨스 #재밌는소설 #쉬운소설 #성종 #이혈 #공혜왕후 #월산대군 #김시습 #한명회 #세조 #사육신생육신 #단종 #비와비관계도 #비와비인물관계도... 2022.08.15 dldml2xhd.tistory.com 벽암두릉연가 성남-덕풍군 이통(德豐君 李通), 경산현령 이원근(李元謹)배위 숙인 진주정씨 27 영창대군이 피살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광릉(廣陵.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등자리) 선롱(先壟) 아래에 은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젊은 시절부터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와 서호 홍식(西湖 洪湜)등은 글과 술로써 맺은 친구들로 그들은 자주 찾아왔으나 그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으니 사람... 덕수이씨 덕수이씨 의정공파묘역 덕풍군 덕풍군 이통 이원근 배위 2020.07.04 성남-송석 이경안 松石 李景顔, 이직李稷, 능호 이래 菱湖 李棶 통합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