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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 쿠빌라이 칸 - 나무위키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 사실상 통합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으로 이후에는 울루스들의 독자적 세력 형성이 시작된다. 시호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재위기간 몽골 제국 대칸, 1260년 5월 5일 ~ 1294년 2월 18일(33년 9개월) 개요 언어별 표기 생애 대외 관계 마르코 폴로 평가 가족관계 대중매체에서 2024.05.13 웹문서 검색 더보기 외할아버지 - 나무위키 고려 - 나무위키 blog.naver.com 지환지환쌤의 방구석 역사 여행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다 2탄: 쿠빌라이 칸과 원의 멸망 13 가) 황제 키워드 : 임안(남송 수도) 함락 -> 쿠빌라이 칸 (나) 황제 키워드 : 적(원)을 몰아내고 한족 국가 건설 -> 명 홍무제 정답은 2번입니다. 쿠빌라이 칸은 고려와 함께 일본 원정을 단행했습니다. 5. 필기노트로 학습하기 몽골(원나라)을 정리한 필기노트입니다. 칸 별로 업적을 정리해 주세요~ 몽골의 사회... 2024.05.26 블로그 검색 더보기 cafe.daum.net 樂soccer 세계 제일의 권력자를 치료한 고려시대 명의 가길 권유하였지만, 부인은 고려에서 살길 바랐고 결국 설경성 또한 고려에 남게 되었다. :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설경성의 소식을 기다리던 쿠빌라이 칸은 고려로 사람을 보내 설경성을 다시 원나라 대도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설경성은 결국 고려와 원을 수차례 오가며 진료하였고, 쿠빌라이 칸은 설경성을 후대... 2024.03.21 카페 검색 더보기 대몽항쟁~강화 때까지 '고려에 대한 몽골의 정보력' 수준 blog.naver.com 어이무사의 게으른 공부방 쿠빌라이 칸 1215~1294 (위키백과)&카라콜룸(和林), 고려 왕전태자와의 첫만남 86 불교를 받아들였다. 몽골 제국과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에 의해 쿠빌라이 칸은 유럽의 전설이 되었다. 또 한편, 카안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 왕거(王昛) 재위1274년 ~ 1308년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고, 아리크 부케... 2024.05.27 blog.naver.com 아넬카의 지식창고 [책추천]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 by 모리스 로사비 9 통치권을 행사하는데 성고했지만 1233년 고려 왕은 강화도로 건너가 버렸다. 투항한 고려인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몽골군은 해군력이 약하다는 점은 인식하고...마지못해 하카타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어느 기록에 따르면 1만 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폭풍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몽골 제국과 쿠빌라이 칸... 2024.05.13 sugisa.tistory.com 晛溪 斗井軒 Sugisa ■고려(원간섭기)에 합단적(哈丹賊), 카다안(哈丹)의 침입(侵入)!■ 2. 배 경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고려의 제24대 원종(元宗)은 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조 쿠빌라이 칸 군대와 아리크 부카 군대와의 내전에서 쿠빌라이의 편에 붙었다. 쿠빌라이 칸 그 무렵,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도 다른 문제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같은 몽골 제국의 계승 제국들 중 하나였던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와의 내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중앙아시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카이두는 칸을 참칭한 후, 제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에게 격렬하게 대 3.1. 폭풍전야 즉 카다안의 침입은 원나라 내부, 심지어 보르지긴 가문 내의 왕위 계승 전쟁이 이웃인 고려에까지 불똥이 튄 경우였다. 1290년 1월 경 원나라에서 돌아온 오인영(吳仁永) 등은 이 정보를 입수하여 고려 조정에 카다안이 침공해 온다고 보고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홍자번(洪子藩)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정가신(鄭可臣)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징발하는 한편, 안전(安戩)을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 김지숙(金之淑)을 전라도 도지휘사(全羅道都指揮使)로 각각 임명해서 방어군을 편성... 3.2. 정수기의 삽질 이런 상황에서 해가 흘러 1291년이 되었다. 이 해 정월 20일, 카다안의 군세는 철령(鐵嶺)에 이르렀다. 그러자 작년에 보낸 정수기는 싸움 한번 안 해보고 달아나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다. 적의 군세가 워낙 강하면 물러날 수도 있긴 한데, 큰 문제는 정수기가 급하게 도망치느라 양식을 모조리 두고 달아났다는 점이었다. 당시 카다안의 군대가 지난 길은 길목이 좁아 말을 탄 병사들도 내려서 걸어야 했기에 대단히 지쳐 있었고, 극악의 식인 행위를 했을만큼 궁핍한 상황이었으나 정수기가 버리고 간 양식을 먹어 다시 힘을 냈다... 3.3. 치악성 전투 : 원충갑의 맹활약 이때 고려의 각 고을에서는 카다안의 군대가 이르렀다는 소문만 들려도 모두 달아나는 판국이라 이를 저지하려는 병사조차 없었다. 카다안은 이 무렵에 현 강원도 원주시인 원주(原州)에 머물며 여기저기 노략질을 하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보급하려 했다. 게중에 기병 50여명 가량은 현재의 치악산에 있었던 치악성(雉岳城) 아래까지 와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原州別抄鄕貢進士)였던 원충갑(元沖甲)이 보병 6명을 이끌고 이를 공격해서 기병 50여명을 쫓아내고는 이를 추격하여 말 8필을 탈환했다... 3.4. 충렬왕의 무책임한 태도 이렇게 고려 내부에서 맹장 원충갑이 격렬하게 분전을 펼치는 동안, 당시 왕세자였던 훗날의 충선왕(忠宣王) 왕원은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명민했던 세자 왕원은 2월경 장군 오인영(吳仁永)을 외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에게 보내 고려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도록 했는데, 카다안의 반란군이 부마(쿠르겐)국인 고려의 북계(北界)를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노년의 쿠빌라이 칸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 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 그러자... 3.5. 연기 전투 연기 전투 기념비 이런 막장극을 찍는 와중에 5월 1일 경, 카다안의 군대가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인 연기현(燕岐縣)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세도칸의 원나라 군대와 고려군은 밤낮으로 행군을 해서 정좌산(正左山) 아래로 진군했고, 여기서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이 공격은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본래 원 - 고려 연합군은 근방의 목주(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에 머물고 있었는데 카다안의 위치가 파악되자 빠르게 이동하여 포위전을 벌인 것이다.별안간에 공격을 받은 카다안군은 크게 놀라 산으로... 3.6. 한희유 무쌍 연기 전투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카다안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10]5월 8일 카다안은 다시 한 번 고려군과 진을 치고 대치했다. 이때 적군의 용맹스러운 병사 한 명이 나서서 활을 쏘았는데, 쏘는 족족 고려 병사들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한희유는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말을 몰고 1장 8척이나 되는 장창을 휘두르며 적에게 달려들었고, 놀란 적은 도망쳤지만 결국 잡혀서 목숨을 잃은 후 목이 잘려 창대에 걸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모습을 본 카다안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그런 상황속에서 고려... 3.7. 일 다 끝나자 돌아온 왕 충렬왕(忠烈王) 두 번의 승리 이후 인후와 한희유, 김흔 등은 포로 등을 바치고 고려군이 승리했음을 알렸다. 그러자 충렬왕은 배를 타고 개경으로 나왔는데, 그러면서 "과인은 적을 토벌하는 전투에 나설 것이다." 라고 선포했다.한편 세도칸 등도 승리를 거둔 후 5월 27일 개경에 돌아와 제국대장공주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틀 후에 충렬왕은 승전을 축하한다며 술이나 먹고 놀자면서 세도칸을 초대했으나, 세도칸은 "이미 명령받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더 지체할 수 없다." 는 간지폭풍의 발언과 함께 그 즉시 떠나버렸다.세도칸 3.8. 이무의 무쌍과 전쟁의 종결 이때 카다안의 기병 3,000여 명이 추가로 철령을 넘어 교주에 주둔하였고, 이 중에 1,000여 명은 강원도 철원 부근까지 진군했으나 연기 전투 등의 패배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고려군은 잔당 괴멸에 나서, 6월 1일 김흔을 죽전(竹田)으로, 한희유를 충청도로, 나유를 교주도로 보냈다. 적병 530여명 등은 한희유에게 항복해오기도 했다.그런데 카다안의 아들인 라오데이는 이미 죽전을 넘어 서경으로 진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자 당시 배에 타고 있던 나유는 육지에 상륙해서 라오데이와 싸우려고 하였다. 이에...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고려의 제24대 원종(元宗)은 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조 쿠빌라이 칸 군대와 아리크 부카 군대와의 내전에서 쿠빌라이의 편에 붙었다. 쿠빌라이 칸 그 무렵,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도 다른 문제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같은 몽골 제국의 계승 제국들 중 하나였던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와의 내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중앙아시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카이두는 칸을 참칭한 후, 제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에게 격렬하게 대 2024.03.26 고려말 개성을 찾다.(FOUND THE CAPITOL CITY OF THE LAST PERIOD OF GOLI ) /元에게 高麗가 영토를 잃게되는 기록 통합웹 더보기
서비스 안내 스토리의 글을 대상으로 검색결과를 제공합니다. 자세히보기 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제왕운기-단군을 한민족사에 처음 편입한 선구자의 서사시는 표문과 중국 신화로 시작한다 13 충렬왕(忠烈王, 1236~ 1308, 고려 25대 왕,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사위)까지 역사를 읊고 있다. 고려 이승휴의 시대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 고려 충렬왕의 장인 이자 징기즈칸의 손자, 13세기 중국 원나라 건국자이다. www.history.com 6.제왕운기는 우리 민족은 하늘(天,천)과 연결되는 단군(檀君)을... 2024.01.08 티스토리 검색 더보기 김별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몽골 8 ~카라코롬 칭기즈칸의 도시 19 말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를 알면 부분적으로 알던 것의 퍼즐이 맞춰지니 재미있고 다른 문화를 더 깊이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쿠빌라이 칸은 1274년과 1281년 고려와 연합하여 두 차례나 일본 정벌을 꾀 했으나 신이 말린 건지 바다의 풍랑으로 다 실패했다. 개인적 생각으론 그 광대한 제국의 땅을 두고... 브런치북 중앙아시아와 몽골여행 몽골제국 몽골여행 수도 2023.07.10 브런치스토리 검색 더보기 story.kakao.com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서일환의역사이야기 - 카카오스토리 요구했다 1258년 고려 원종이 항복하여 무신정권은 붕괴되고 몽골족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쿠빌라이칸이 고려 원종의 도움을 받은 즉위하여 대원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부원배들이 고려... 2024.03.17 카카오스토리 검색 더보기 인문·교양 크리에이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