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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sng.tistory.com 류시영 정유재란 노량해전 역사기행Ⅲ(하동 연대봉, 노량해협) 34 0 탐방일시:2023년 2월 13일 0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뒷산인 연대봉(447m)에 오르면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을 끝내려고 치열한 전투를 했던 바다와 노량해협이 발 아래로 보인다. 광양 구봉산에서 내려와 하동의 노량항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남농협과 노량교회를 지나 마을 뒤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굴다리가... 2024.02.15 블로그 검색 더보기 정유재란 노량해전 역사기행Ⅳ(남해 노량공원, 관음포) 정유재란 노량해전 역사기행Ⅱ(광양 구봉산 전망대) cafe.daum.net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노량해협은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7 하동지회분들과 노량 영화를 단체관람했다 2023년 12월 30일 하동 영화관에서 24년 갑자년에는 푸른용의 기운을 받아 청춘으로 돌아가 공부도 하고 새로운 회원도 영입하자는 의견에 일치했다. 이배사 회원님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요 역시 장군님! 2024년 새로운 계획들 다 이루시길요.. 근데 관람비는 전국에서 진해가 젤 비싼가요?..지난번 충주도 7,000원..하동도 7,000원.. 제가 인터넷으로 예약해서 그런가?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더 싸지 않은가?..ㅎㅎ 반가운 얼굴들.... 청룡의 기운 받아 기대하는대로 활성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반가운 얼굴 얼굴 얼굴들입니다. 모두 모두 2024에도 건행하세요^^ 쌍계에 눈 녹으면 출타를 하실런지..... 선승도 안거가 끊나면 만행을 하는데 어찌 하동 가족은 무문관 수련만 하시는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동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더보기 2023.12.31 카페 검색 더보기 노량해협 횡단 도전 노량해전장을 가다 gaengsangdo.tistory.com 갱상도닷컴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숨결 노량해협 따라 흐르는 듯 ◇노량해전이 벌어진 관음포 앞바다 남해 하면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역사의 풍랑이 거셌던 데이기도 하다. 430년 전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임진왜란의 마지막 끝자락 회오리가 남해를 몰아쳤다. 하동에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건너면 노량마을이 나타난다. 첨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포 앞바다 노량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치러진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둔 곳이다. 왜적은 전선 500척에 병력 6만 명이었고 조명 연합 수군은 전선 150척에 병력은 2만 명 정도였다. 1598년 11... ◇장군의 시신이 뭍에 오른 이락포 장군의 시신이 처음 뭍에 오른 자리가 바로 관음포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34년 만인 1832년에 제단을 만들고 유허비를 세웠다. 한글로 새겨진 '리충무공전적비'도 있는데 6.25전쟁이 한창일 때 남해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이락포라고도 하는데 이순신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쓴다. 여기서 솔숲을 500m 정도 오르면 첨망대가 나온다. 해 질 무렵 첨망대에 오르면 앞바다가 노을을 받아 온통 붉은빛이다. 430년 전 그날 피로 물든 바로 그 바다다. 옆에는 이순신순국공원이 있는데 호국광장과 관음포광장으로 나 ◇장군의 가묘를 썼던 충렬사 장군의 시신은 노량나루 근처 지금 충렬사 자리에 잠깐 머물렀다. 지금도 사당 뒤편에 가묘가 남아 있는데 그러다 수군 본영이 있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진 다음 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 묻혔다. 남해 충렬사 사당 뒤편에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 충렬사는 1632년 처음 지어질 때는 조그만 띠집이었다. 조정에서 베푸는 공식 이전 이전에 남해 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초가 한 칸을 짓고 처음 제사를 올렸다. 조정은 1643년에 '충무공' 시호를 내렸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를 얹은 것은 다시 15년이 지난 1658년... ◇고려 시대 관음포대첩과 정지석탑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친 역사는 고려 말기에도 있었다. 1374~1388년 모두 380차례가량 한 달에 두 번꼴로 침략했을 정도로 왜구의 준동은 극심했다. 이런 와중에 정지 장군이 등장했다. 최영 이성계와 어깨를 겨루던 당대 명장이었다. 1383년 5월에 왜구가 120척 적선을 타고 관음포로 쳐들어왔다. 정지 장군은 멀리 전라도에서 손수 노를 저으며 와서는 앞장서서 진격하고 화공을 퍼부었다. 적선 17척이 불타면서 물에 빠져 죽은 왜구 2000명가량이 바다를 덮었다. 남해 고현면 탑동마을에 가면 관음포대첩을 기리는 '정지석탑 4 남해 하면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역사의 풍랑이 거셌던 데이기도 하다. 430년 전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임진왜란의 마지막 끝자락 회오리가 남해를 몰아쳤다. 하동에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건너면 노량마을이 나타난다. 첨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포 앞바다 노량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치러진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둔 곳이다. 왜적은 전선 500척에 병력 6만 명이었고 조명 연합 수군은 전선 150척에 병력은 2만 명 정도였다. 1598년 11... 남해 이순신 충렬사 노량해전 첨망대 관음포 노량해협 한글비 정지 장군 이락포 2024.02.02 namu.wiki 노량 해전 - 나무위키 노량 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낸 전투이자 이순신 생애 최대, 최후의 해전이다. 시기 1598년 12월 16일 새벽 양력,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음력 장소 조선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現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고현면 차면리)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에 따른 일본군 철수 교전국 조선-명 연합, 승 | 일본, 패 병력 조선 수군, 병사 6,000~7,000명, 판옥선 50척~60척, 협선+방패선 80~180척, 명나라 수군, 병사 15,000~18,000명, 판옥선 2척, 사선+호선 300척 | 일본 수군, 병사 22,000~23,000명, 안택선+세키부네(일부 고바야) 약 350척이상 개요 배경 전개 가설 대중매체에서 관련 문서 2024.06.05 웹문서 검색 더보기 한려해상국립공원 - 나무위키 노량대교(서울) - 나무위키 blog.naver.com 남해랑 썸타자 노량대첩의 현장 노량해협과 남해대교를 바라보며 해안가 산책하기 12 1973년에 완공된 경남 남해군과 하동군을 이어주는 국내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 완공된지 50여년이 지났지만 멋진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량해협을 바라보고 있으니 역사 속의 한순간에 들어와 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해안가를 따라걸으니 잔잔한 바다물 건너 멀리 있는 하동군의 마을 모습도... 2024.02.22 통합웹 더보기
서비스 안내 스토리의 글을 대상으로 검색결과를 제공합니다. 자세히보기 나를 찾아가는 작업 리빙 분야 크리에이터 노량해전 : 임진왜란을 끝낸 이순신 최대이자 최후의 해전 노량해전 소개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으로 11월 19일 날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과 진린이 이끈 명의 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이긴 전투를 말한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로 조선의 승리를 결정짓는 전환점이 된 해전이기도 하다. 정보 시기 1598년 12월 16일 새벽(음력 : 11월 19일) 장소 조선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현재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에 따른 일본군 철수 교전국 조선 - 명(추격, 승리) 일본(도주, 패배) 지휘관 이순신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 - 조선 수군 : 병사 6000명 ~ 7000명, 판온석 4 ~ 60척, 협선+방패선 80 ~ 180척- 명나라 수군 : 병사 15000명 ~ 18000명, 판옥선 2척, 사선+호선 300척 일본 수군 : 병사 22000명 ~ 23000명, 안택선+세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을 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일본의 절대 권력자였기에, 그의 사망은 일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은 자신의 나라로 철수를 하려고 했다. 일본군은 순천왜성을 거점으로 조선 남해안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량해협을 통과하여 순천왜성을 탈출하려고 계획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일본군의 철수를 예상하고, 노량해협에 매복하여 기습하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명나라 수군 진린의 도움을 받아 복병 함대를 전개 1598년 12월 15일, 일본 수군은 창선도를 출발하여 노량해협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일본 수군은 시마즈 요시히로, 구루시마 미치후사,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 일본 수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이끌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출항을 보고, 명나라 수군 진린과 함께 노량해협에 매복한다. 12월 16일 새벽, 일본 수군이 노량해협을 통과하기 시작하자, 이순신은 계획대로 복병 함대를 출동시켜 기습 포격을 가했다. 일본 수군은 혼란에 빠졌고, 이순신은 본진을 이끌고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기습으로 인해 일본 수군은... 결과 조명 연합수군은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다. 노량해전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조선을 침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남은 일본군은 순천왜성을 버리고 부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하며 임진왜란은 사실상 종결시키게 도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은 조선의 큰 손실로 되었지만 그의 업적은 지금도 기리고 있으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 명량, 한산에 이어 3부작 마지막인 노량이다. 이순신장군의 마지막과 노량해전이 모습들이 담겨있다. 마무리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저렇게 말을 하진 않았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은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려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얼추 비슷하긴 하다. 내가 죽음을 직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내놓았다는 측면에서는 가히 그의 성품을 짐작하고도 남는 것 같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아래 지금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누구도 태클 걸 수 없는... 4 시기 1598년 12월 16일 새벽(음력 : 11월 19일) 장소 조선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현재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에 따른 일본군 철수 교전국 조선 - 명(추격, 승리) 일본(도주, 패배) 지휘관 이순신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 - 조선 수군 : 병사 6000명 ~ 7000명, 판온석 4 ~ 60척, 협선+방패선 80 ~ 180척- 명나라 수군 : 병사 15000명 ~ 18000명, 판옥선 2척, 사선+호선 300척 일본 수군 : 병사 22000명 ~ 23000명, 안택선+세 정보 소개 결과 영상 이순신 배경 전개 노량해전 노량 : 죽음의 바다 2023.12.21 티스토리 검색 더보기 방구석 지식in 글쓰기 분야 크리에이터 '노량대첩'과 호남의 송곳 - [유튜브] 인문학 유니버스 4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정유재란은 1598년 12월 16일, 선조 31년에 벌어졌습니다.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치열하게 싸운 전투입니다. 오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 이순신 역사 콘텐츠 2023.12.29 브런치스토리 검색 더보기 story.kakao.com 산노을여행사 문병운 산노을여행사 문병운 - 카카오스토리 20 하동 노량해전 그 곳~ "대도" 섬 여행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이순신장군 마지막 전투.. 충혼이 깃든 노량해협 2024년 새해 해맞이 2박3일 여행 중에서.. 2023.12.31 카카오스토리 검색 더보기 리빙 크리에이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