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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 독성산성 전투(임진왜란) - 나무위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에서 권율이 참여한 전투로서, 승리하여 경기도 지역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시기 1593년(선조 26년) 1월 13일(1592년 음력 12월 11일) 장소 경기도 오산시 독산성 교전국 조선, 승 | 일본, 패 주요인물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병력 조선군: 10,000명 | 일본군: 20,000명~30,000명 개요 배경 전개 의의 2024.05.26 웹문서 검색 더보기 울산성 전투 - 나무위키 벽제관 전투 - 나무위키 astra-fire.tistory.com 잡학다식 임진왜란 주요 전투 4 - 평양성 전투 1. 제1차 평양성 전투 제1차 평양성 전투는 1592년 7월 21일부터 22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한 후 1592년 7월 9일 개성을 함락한 다음 평양성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선조의 경우, 평양성을 사수하고자 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기세에 눌려 의주로 몽진을 결정하였고 평양성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및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사수하게 되었습니다. 1592년 7월 20일 광해군은 평양 전역의 남성들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정비하였고 광해군 자신 역시 평양성 사수를 위해... 2. 제2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는 1592년 8월 23일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한 이후에 명나라에 이덕형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에게 4,000여 명의 군사를 내주어 1차 원군을 조선에 파견하였습니다. 조승훈이 이 끄는 명나라군은 1592년 7월초에 압록강을 건넜고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4,000명 군사와 합류하여 평양 북방지역인 순안군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평양성에는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 8,000여명과 구로다 나가마사 군 1만여 명이 주둔하 3. 제3차 평양성 전투 제3차 평양성 전투는 1592년 9월 6일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이후 명군은 요동으로 철수하자 조선은 조선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병력을 모아 조선군 단독으로 평양성 탈환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2차 전투에 걸쳐 일본 군의 병력이 크게 소진되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평양성 공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는데 북쪽에서는 순찰사 이원익 순변사 이빈이 서쪽에서는 조방장 김응서가 남쪽에서는 별장 김억추와 임중량 등이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4. 제4차 평양성 전투 제4차 평양성 전투는 1593년 2월 6일부터 9일까지 총 4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로 4차례 발생한 평양성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명나라 조승훈의 1차 원군이 패배 후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에 대군 파견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북방 주력군인 요동군을 조선에 파병하고 송응창을 최고 사령관으로, 이여송을 현장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43,000명의 군사가 조선에 2차 원병으로 파견됩니다.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려... 제1차 평양성 전투는 1592년 7월 21일부터 22일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한 후 1592년 7월 9일 개성을 함락한 다음 평양성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선조의 경우, 평양성을 사수하고자 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기세에 눌려 의주로 몽진을 결정하였고 평양성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및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사수하게 되었습니다. 1592년 7월 20일 광해군은 평양 전역의 남성들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정비하였고 광해군 자신 역시 평양성 사수를 위해... 2024.02.18 블로그 검색 더보기 임진왜란 주요 인물 열전 10 - 고니시 유키나가의 생애 blog.naver.com 역사 영화 이야기 [역사영화/조선] 비밀병기 혼 -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를 배경으로 한 중국 B급 액션 영화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5년간 경상도 남부에 주둔한 일본군과 지리한 국지전을 계속해야만 했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 1) 전쟁의 판도를 바꾼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6월(선조 25, 음력. 이하 모두 음력) 평양성이 함락된 때부터 명군과의 협공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때... 2024.01.08 100.daum.net 백과사전 제1차 평양성 전투 다른 뜻전역상자 임진왜란 제1차 평양성 전투(第一次平壤城戰鬪) 또는 대동강 전투(大同江戰鬪)는 임진왜란 중의 한 전투이다. 전투의 결과로써 일본군은 공격대상인 평양성을 점령하게 되었다. 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백과사전 검색 더보기 출처: 위키백과 mumumiki.com 무무미키 임진왜란, 제4차 평양성 전투 전투 배경 조승훈의 1차 원군이 포함된 제2차 평양성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게 되자, 명나라에서는 대군 파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마침 요동의 반라닝 정리되고 요동주력군이 재정비할 수 있게 되자, 이여송을 필두로하여 4만3천여명의 병력을 조선에 2차 원군으로 보내게 됩니다. 압록강을 건넌 명나라군대는 조선의 병력 (관군과 승병으로 구성) 약 1만여명의 병사와 합세하여 평양성으로 향했는데, 당시 명나라는 휴전협상을 빌미로 일본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평양성에서 대기하던 고니시는 조명연합군이... 전투의 전개 고니시는 결국 독자적으로 평양성 방어를 해야만 했는데, 각 시설을 정비하고 근처 모란봉에 2천명의 별동대(조총부대)를 배치했습니다. 1593년 2월 (음력 1월 6일) 조명연합군은 서쪽 평양성 외성을 포함해 평양성 전체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명나라 군은 초반에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기세를 잡았으나, 남쪽 공격을 담당했던 조선군은 일본의 매복에 걸려 큰피해를 입고맙니다. 이후 조명연합군은 각 종 화포를 활용해 평양성을 집중공격하면서 대 공세를 감행했는데, 조명연합군의 계속된 공격에 평양성 외성과... 전투의 결말 격렬한 전투양상을 띄었는데요. 전투 후반부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자 이여송은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군대를 철수시킨뒤 일본군에게 성을 열어주고 퇴각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고니시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아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일본군은 평양성을 빠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양성을 빠져나온 고니시의 부대는 한양으로 향했는데, 한양에 도착했을때의 고니시 부대의 규모는 6천여명으로 당초 1만 8천에 달하던 부대규모가 1/3로 줄어들게 되었는데요. 물론 상당부분 비전투손실로 예상되나 제4차 평양성 전투 전투이후 명나라군대의 학살 논란 한편, 평양성을 점령한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의 백성 만명정도를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당시 이 소문으로 인해 명나라와 조선 조정이 직접 이 소문을 확인하러 나서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문은 근거가 없던 소문이었고 이후 기록에서도 명나라 학살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명연합군의 1/3이 조선군이었는데 명나라군이 1만명이 넘는 학살을 자행했다면 조선군이 이를 가만히 지켜봤을리가 없고 이 정도 규모의 학살은 설사 감추려한다한들 이후 풍문으로라도 소식이 알려져 기록에 남아있어야... 전투의 결론과 영향 임진왜란 제4차 평양성 전투는 조선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조선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이후 임진왜란의 판도를 뒤집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마무리 지금까지 평양성에서 이루어진 1,2,3,4차에 걸친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진 평양성 전투는 4차 평양성 전투였는데요. 그 전의 크고 작게 1~3차에 걸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임진왜란의 여러 알려지지 않은 전투에 대해서 기록 및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임진왜란 제4차 평양성 전투는 조선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조선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이후 임진왜란의 판도를 뒤집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임진왜란 평양성 탈환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 제4차 평양성 전투 명나라 원군 고니시부대 임진왜란 평양성전투 2023.10.23 임진왜란, 제3차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제1차 평양성 전투 csense.tistory.com 깊이 있는 역사 이야기와 신뢰할 수 있는 세계 소식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때 이긴 이유를 알아봅시다 3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때 이긴 이유를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일본군은 당시 신무기였던 조총을 주력무기로 해서...져서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합니다. 그 후 1592년 7월에 명의 조승훈이 평양성을 한번 공격했지만 탈환은 못 했고요. 1592년 8월에 조선의 김명현이 다시 한...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2023.10.16 통합웹 더보기
서비스 안내 스토리의 글을 대상으로 검색결과를 제공합니다. 자세히보기 마하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영화 '노량'의 시마즈와 사쓰마(가고시마) 천년 가문 어떤 한 가문이 천년 가까이 한 지역을 다스리거나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역이라 함은 도시도 해당되고 확장해서 국가로 넓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 총 역사가 2,200년을 넘겼지만 위의 조건엔 부합하지 않습니다. 395년 제국이 동서로 쪼개지고 수도는 그 이전 로마에서 오늘날 이스탄불로 천도해서도 그렇지만 공화정이든 제정이든 한 가문이 다스린 것은 천년의 역사에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도시와 가문이 일치될 정도로 피렌체 하면 떠오르는 메디치 가문도 1743... 시마즈 가문의 출현 시마즈 가문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1185~1333) 때부터 사쓰마의 실력자로 그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로 등장합니다. 시마즈 타다히사(?~1227)가 바로 그 가문의 1대 당주였습니다. 점차 규슈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던 그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1336~1573)를 거쳐 혼란기인 전국 시대를 거치며 규슈 지방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습니다. 본토인 혼슈에서 오다 가문의 노부나가와 그를 잇는 도요토미 가문의 히데요시가 활개를 펼쳤다면 규슈엔 시마즈 가문이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1587년 시마즈 가문은 규슈 임진왜란과 명량, 한산, 노량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출정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조선 땅은 그에겐 작은 꿈에 불과했습니다. 영화 <노량>에서도 명나라의 진린(정재영 분) 제독이 왜군에게 화를 내며 소리친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단계로 통과의례로 생각했던 조선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한반도를 유유히 통과해 명나라를 거쳐 동남아의 필리핀과 인도까지 정복하고자 하는 대망을 가졌습니다. 그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꿈꾸었던 대륙 정벌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은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영화 <노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1598년 9월의 일로 그는 교토의 후시미 성에서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에 노량 해전이 일어났으니 이 기간엔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의 철수가 최대 이슈인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의 종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다수의 부하 다이묘들이 반대했던 그 전쟁을 그가 무모하게 일으켰는데 그가 죽었으니 전쟁의 명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그가 죽으면서 한 가장 큰 걱정은 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늘그막... 시마즈 가문의 부상 위의 내용은 이곳에 쓴 <메이지 유신의 프리퀄 세키가하라 전투>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 그 글에서 김한빈 감독의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영화 <노량>이 나온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전 영화인 <명량>과 <한산>에서 출연했던 왜장인 구루시마(류승룡 분)와 와키자카(변요한 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인물에 대한 캐릭터도 가장 강력하게 설정해서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노장인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가문의 개화(開花)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상무정신이 가장 센 지역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가고시마입니다. 한마디로 호방하고 싸움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고시마에 쌀농사가 없다는 점에서도 기인할 것입니다. 과거부터 그곳은 화산지대라서 쌀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가고시마 앞바다에선 활화산인 사쿠라지마가 매일 연기와 재를 뿜어대고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신 고구마 농사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가고시마는 예로부터 주식인 쌀을 얻기 위해서라도 싸웠을 것입니다. 중앙... 천년 가문 시마즈 이렇듯 천년 가문을 향해가고 있는 시마즈 가문은 12세기 이후 일본의 주요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거쳐 전국 시대에 등장했고 우리의 임진왜란에도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내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류큐 정벌에도 등장했으며 결정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메이지 유신에도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별개로 일본의 부국강병에 기여한 도자기 산업에도 그 가문은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영향력은 32대 당주에 이른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과거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10 이렇듯 천년 가문을 향해가고 있는 시마즈 가문은 12세기 이후 일본의 주요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거쳐 전국 시대에 등장했고 우리의 임진왜란에도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내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류큐 정벌에도 등장했으며 결정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메이지 유신에도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별개로 일본의 부국강병에 기여한 도자기 산업에도 그 가문은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영향력은 32대 당주에 이른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과거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역사 인문학 영화 2024.01.06 브런치스토리 검색 더보기 story.kakao.com 서일환의역사이야기 서일환의역사이야기 - 카카오스토리 부여되는 정2품의 관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명원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로 임명되어 한양성 전투에서 패배했고 8도 도원수로 승진하여 임진강 전투와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김명원은 정유재란... 2024.04.14 카카오스토리 검색 더보기 인문・교양 크리에이터 보기